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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준 행운…설원 속의 '영릉'
세종왕릉 英陵과 효종왕릉 寧陵
 
박익희 기자 기사입력  2014/02/10 [00:49]
▲  세종대왕릉 홍살문  ©박익희 기자


 입춘이 지났건만 지난 8일 토요일 밤에는 대관령을 기준으로 강원산간 지방에는 적설량 70cm라는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왠지 분분히 날리는 눈을 맞으며 마음은 들뜨고 기분이 좋아진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한 설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순결해진다.

불현듯 여주에 있는 영릉을 찾아가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영릉을 여러 차례 답사했지만 눈덮힌 영릉을 본적은 없었다.

 우리나라 조상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을 뽑으라면 누굴까? 아마도 세종대왕이 단연 으뜸이리라. 
충녕대군이었던 세종은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과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있었다. 하지만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세자 시키고 세째인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세종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군왕으로서 갖출 덕목과 인품을 갖추고 책에서 배우고 느낀 것과 선왕 태종의 목숨 건 투쟁과 치열한 생존에서 권력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를 몸소 격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본다. 

▲ 눈 덮힌 세종왕릉 모습     ©박익희 기자


무엇보다도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을 문맹에서 눈을 뜨게 만든 점은 가장 큰 업적이라고 감히 얘기한다.

또한 학문을 숭상하여 많은 책을 편찬하고 학문의 풍토를 조성하고 과학자를 등용하여 과학을 중시하여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고 국방을 튼튼하게 했다. 

대왕이란 칭호답게 세종대왕이 묻힌 왕릉은 유명세만큼이나 사람들이 붐빈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풍수지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단박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 능상에서 본 영릉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으로 혼유석은 2개가 놓여있다.  © 박익희 기자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의 합장 능이다. 하지만 한자 꽤나 아는 사람도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중에 어느 것이 세종인지 효종인지는 헷갈린다. 

우리말의 약 70%는 한자어로 되어 있는 까닭에 한문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뜻을 모른다. 실제로 한글로 읽기는 읽지만 뜻을 모르고 읽는 경우가 많다.

 미래학자들이 세상의 중심이 동양으로 옮겨진다니 한문을 익혀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고 지금이 바로 기회인 셈이다. 
  
 매표를 한 후 세종 왕릉으로 입장하자 왼쪽에는 각종 과학기기들이 노천에 전시되어 있다. 
천체를 관찰하고 해와 달을 관찰.기록하는 그 당시 만든 최첨단 과학기기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혼천의, 앙부일귀, 천체도, 측우기 등이 보였다.

멋지게 조경 단장된 왕릉의 금천교와 홍살문을 지나 어도와 신도를 따라 왕릉을 향해 걸어가니 저절로 엄숙해지고 경건해진다. 정자각에서 참배를 하며 두손을 모았다.

 왕릉 계단을 오르니 눈 속에 파묻힌 세종왕릉은 한눈에 보아도 과연 천하명당이다. 온 세상이 설원으로 변해버려 사철 푸른 소나무의 가치가 더욱 빛났다.
 
천장한 영릉의 지세는 북성산이 남한강에 몸을 담그면서 떨어뜨린 낙맥이 북으로 굽이쳐 달리다가 한 봉우리가 솟으면서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주산인 북성산을 바라보는데 이런 형태를 회룡고조형이라 한다. 

 이런 형세에 혈처를 잡았는데 마치 모란이 반쯤 핀 듯해서 모란반개형이라고도 하고, 주위의 산자락들이 봉황의 날개처럼 펼쳐져 영릉을 품어준다고 하여 봉황포란형이라고도 한다. 

▲ 능상에서 본 왕릉은 포근한 기운이 느껴지는 명당이다. 왕릉에서 바라본 앞쪽 풍경, 릉앞이 발달하여 차남이하가 성하고 장손이 성하지 못하다고 한다 ©박익희 기자


원래 이 자리는 광주(廣州) 이씨 이인손의 묘였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의 할아버지는 고려 말 절의와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집이고 그의 아버지는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이지직이다. 

좌의정이었던 이인손이 별세하자 지관이 이 자리를 잡아 주면서 ‘이 자리는 금시발복지이니 개울에 다리를 놓거나 재실을 짓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인손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자 개울에 돌다리를 놓고 묘 앞에는 재실을 지었다. 마침 천장 물색을 위해 답산에 나섰던 지관과 재상 일행이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돌다리를 건너 재실에서 피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인손의 묘가 천장지로 결정되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시중의 화젯거리로 전해 오고 있다.

▲ 왕릉 앞 광장의 설경 모습     © 박익희 기자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부왕 태종의 능침인 헌릉 옆에 자리를 잡아 쌍실을 만들고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붕어하자 합장하였다. 

 세조 이후 영릉이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종종 천장의 문제가 거론되었으나 서거정의 반대로 무산되다가 1469년(예종 1) 왕통 단절이라는 먹구름이 일자 다시 옮기자는 의논에 따라 이곳으로 천장 하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조는 8남 5녀, 정종은 15남 8녀, 태종은 12남 17녀, 세종은 18남 4녀를 두어서 세종 승하 시까지 왕실 핏줄이 53남 34녀 이었는데 세종 승하 후 19년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4대에 이르면서 문종이 1남 2녀를 두고 병사했고 단종은 사사되었고, 세조는 4남 1녀를 두었으나 의경 세자가 요절했고 예종은, 2남 1녀를 두었으나 장자 인성대군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제안대군은 재목미달이었다. 

왕실 핏줄의 빈곤 속에 장남 단명이라는 불길한 일이 계속 일어나자 드세기로 유명한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는 세종 능의 수렴 때문이라고 믿고, 세조의 유지라면서 천장을 서둘렀던 것이다. 
  

▲ 세종왕릉 전경     © 박익희 기자


어쨌든 이 능으로 말미암아 조선 왕조가 100년 더 연장되었다는 설화가 생겨났다. 

이곳으로 옮길 때 천장도감에서 석물을 함께 옮겨 오자고 하였으나 왕명에 의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 그 석물들은 1973년 발굴하여 청량리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겼다. 
 
세종대왕릉 지척에 북벌의 꿈을 꾼 효종의 왕릉이 있다. 여름철에는 세종왕릉에서 효종왕릉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지름길을 개방해야 이용하게 하지만 비수기에는 왕릉관리상 제한을 하여 폐쇄를 한다. 인기가 뭔지 쏠림현상이 너무 심하게 아닌가? 
 

▲ 독특한 형태의 상하로 배치된 효종왕릉과  인선왕후릉     ©박익희 기자

 

▲ 폭설 속의 효종릉의 홍살문     ©박익희 기자


세종왕릉을 찾는 사람은 무척 많으나 효종왕릉을 찾는 사람은 적다. 효종왕릉은 왕릉의 위치와 동원 상하릉이란 독특한 배치형태와 재실의 노거수 느티나무와 천연기념물인 회양목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특히 효종왕릉 앞 주차장 음료대의 지하수는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몇해 전 답사 길에 만난 주민은 자랑이 대단했다. 

▲ 효종릉 동원상하릉으로 정자각과  인선왕후의 능이 보인다.     © 박익희 기자
▲ 효종왕릉 재실의 느티나무     © 박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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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2/10 [00:49]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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