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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러시아 연해주 답사기 4] 101년 전의 연추 마을에 서다
연해주 한인들의 얼을 찾아 나서다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8/12/04 [22:47]
▲ 김성윤 기자, 단국대 명예교수    

독일의 시인 괴테는 알프스의 설산을 처음 보고 너무도 감동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모자를 벗고 “알프스여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정중하게 절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연추 마을을 보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연추여 안녕하셨습니까?” 라고 인사부터 하였다. 연추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눈은 황홀했고, 나의 마음은 감격하였다.

 

연추 마을의‘연추’는 한자로는‘延秋’나‘煙秋’또는‘烟秋’다. 러시아어로는‘얀치헤(Yanchikhe)’로 표기해왔다. 그 어원은 이 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탐험대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강 이름, 즉 연추하(延秋河)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추 마을의 첫 러시아식 공식명칭은 시모노보(Simonovo)로 알려지고 있다. 이 이름은 당시 연해주 군무지사였던 시모노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1867년에서 1869년 사이에 동시베리아총독의 파견을 명령받고 남연해주 지역을 답사한 바 있는 탐험가 프르제발스키(Nikołaj Michajłowicz Przewalski, 1839~88)는 1869년에 간행한 그의 저서 ‘우수리스크 크라이여행(Puteshestvie v Ussuriysk Krei)에서 한인마을 '얀치헤'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우리가 방문 했던 연추의 중심지 하연추 마을도 이 중에 포함된 것으로 추측된다.

 

▲ 왼쪽에 보이는 도로가 중국의 훈춘으로 가는 도로이다. 그 오른쪽 산 아래 끝 동네가 상연추 마을이다.    © 김성윤 기자

 

이 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마을 어귀에 위치한 추카노브카강의 지류인 수하야강(Rechka Sujkhaia)을 경계로 오른쪽 부분을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강둑도 없는 실개천을 따라 오른쪽의 비포장 소(小) 도로로 가다가 또 다른 소(小) 지류인 오른쪽 개천을 따라 약 300m쯤 올라갔다. 그곳에서 미국인 여성 베다니 선교사님이 북한 노동자를 도우려고 농장운영을 계획하였다가 본국으로 일시 귀국하였는데 재입국하려 했으나 입국이 거부되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 베다니 선교사님 집으로 가는  삼거리 길로 멀리 산이 보이는 쪽으로  약 300m 가면 베다니 선교사님 집이 나온다.    © 김성윤 기자

 

그리고 지금은 빈집으로 있다고 하여 그곳을 찾아갔다. 우리를 안내한 한인 3세 리가이 와딤은 1947년에 우즈베크공화국 타슈켄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1920년에 하산지역 포시예트 마을에서 출생하였고 어머니 역시 연해주 첼리코브 마을에서 출생하여 평화롭게 살던 중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우즈베크공화국으로 갔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1972년에 모스크바대학 지질 학부를 졸업하고 카자흐스탄 수자원 탐색연구소에서 수원탐색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정년을 하고 2015년에 연해주 알쯤시로 이주하였으며 2017년부터 고려인정착촌 복원 “두만강” 기금 회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인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가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들이 사는 가까운 곳에서 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연추의 중심지였던 하연추라고 한다.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상연추는 못 가게 되었지만 하연추와 그곳에 살았던 미국인 여성 베다니 선교사님 집은 가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한인들의 최대거주 지역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데다가 아주 저렴한 가격에 집을 임대할 수 있다고 하여 더욱 관심과 구미가 당겼다. 11월 중순인데도 러시아의 초겨울을 몸으로 느낄 정도로 날씨는 얼음이 얼었고 쌀쌀하였다. 사실 내가 이곳에 오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베다니 선교사님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사시다 가셨을까? 에 대한 호기심과 참다운 목도(牧道)의 길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베다니 선교사님 댁의 창고 앞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귀여운 고양이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 김성윤 기자

 

기차는 레일로 가야 하고 인간은 정도(正道)를 가야 한다. 사도 (邪道)는 불행과 파멸의 길이다. 정도는 승리와 행복의 길이다. 세상사 모든 일에는 반드시 정도가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쉽게 빨리 하려고 정도를 벗어나 사도를 가는 경우가 있다. 목회자가 그래서는 안 된다. 나 같은 교직자도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도는 인생의 곡로(曲路)이기 때문이다.

곡로를 가신 분들의 특징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며 감사할 줄도 모른다. 그리고 끝내는 파멸의 길이 기다릴 뿐이다.

 

정도를 택하신 분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일을 바르게 하며 정직하게 살까를 고민한다. 바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아름답고 보람 있게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도  교육자나 목회자는 정도를 가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아무리 좋은 일도 정도가 아니면 가능한 한 자제하고 피하면서 살아왔다. 동양의 현인들은 허망을 버리고 참과 진실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허망한 생각, 허망한 말, 허망한 행동, 허망한 생활은 불행과 쇠망의 원천이요, 나락으로 가는 첨단의 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허망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하연추 마을의 자연과 주택 도로에서 나무 하나까지 우리에게는 모두 교훈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그 마을에서 한인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무한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역사는 진리의 생생한 교과서임에 틀림없다.

 

▲ 우리민족은 배산 임수를 바탕으로 집을 짓고 마을을 가꾸었다. 하연추 베다니 선교사님 댁으로 가는 길의 실개천이 매우 정겹다.    © 김성윤 기자

 

독일의 시인 괴테는 “태양이 비치면 먼지도 빛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 한인 선조들의 생생한 삶과 일상을 볼 수 있는데 그냥 두어야 되겠는가? 어둠 속에서는 먼지가 보일 수 없다. 한 줄기 빛이 비추어 질 때 먼지도 반사의 빛을 발할 수 있다. 부디 우리의 연추탐방이 그 빛이 되기를 빌어 본다.

 

동네로 들어가는 길의 양 옆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개천과 오래된 집과 길모퉁이는 결코 낯설지가 않았다. 배산 즉 뒤로는 산이 있고 그 가운데로 개천이 흘러간 모습이 옛 우리나라 시골 동네를 보는 것 같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반면에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활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평정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즐길 줄 알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고 공자께서 논어의 옹야(雍也)편에서 말씀하셨다.

 

맹자는 옳고 그름을 판별해 낼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곧 지혜의 출발이라고 하였으며,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의 출발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물은 투명하고 깨끗하며 산은 진중하고 넉넉해서일까? 우리 민족은 참으로 지혜롭고 어진 민족이다. 그렇기에 동네를 만들고 집을 지어도 뒤에는 산이요, 앞에는 물을 염두에 두었다. 한인들이 살았던 동네는 국내는 물론이고 이국땅에서조차 이 같은 지혜를 어김없이 볼 수 있다.

 

▲  우리네 시골집과 다를 바 없는 집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래서 더욱 정겨웠다.   © 김성윤 기자

 

 하연추를 가로질러 베다니 선교사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보면 누가 보아도 한인 집처럼 보이는 집들이 여기저기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베다니 선교사님이 사시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다시 입국하려고 하였으나 입국이 거부되었다는 말과 이 집의 내력과 베다니 선교사님에 대하여 정호상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었다. 이제 그 집은 주인을 잃어버린 빈집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그 빈집에 들어가 보았다. 그 집은 비교적 대지는 넓은 편이었다. 그러나 매우 낡고 누추해 보였다. 마당 가운데에는 우리의 옛 두레박우물이 있었고 마당의 동서쪽의 비탈진 언덕엔 흙을 덮어 만든 냉장고 대신 쓰는 자연냉동고가 있었다.

 

집 내부는 나무로 난방이 가능한 벽난로 페치카가 있었는데 난방으로 쓰기에는 너무 열악하였다.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영적 교류와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이곳에 거주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주위에 편의 시설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문명인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보호를 받으려면 하느님이 좋아하는 것, 하늘이 귀히 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 베다니 선교사님은 이를 실천하며 사셨던 것으로 보였다.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살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삶의 지혜로 삼아 살아오면서 기독교방송(Daily Good News)국의 객원 논설위원으로 최선을 다하여왔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님들의 사역이 뭔지도 어떤 환경에서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일상을 사시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베다니 선교사님이 냉장고로 사용했던 비탈진 곳에  흙으로 만든 자연냉동고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 김성윤 기자

 

베다니 선교사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경천애인(敬天愛人),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은 사람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기독교도나 불교도를 막론하고 교리의 중심에 있다.

 

우리는 해방이후 열심히 일하여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 이면에는 '돈과 성공'이 중심에 있었다. 사람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적 가치는 그만큼 멀리 있었다.

 

이에 대한 잘못을 베다니 선교사님이 사셨던 집을 통하여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일깨워준 것이 아닐까? 불교의 고승 서산대사도 마찬가지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고 가셨다. 그 정신이 무소유 , 나눔 정신이 아닌가?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만 계실 뿐 밖에 나가서 활동하지 아니하고 많은 제자를 가르치셨다. 그 대사께서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거울을 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했다.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나였는데,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는 순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이를 임종게(臨終偈)라고 한다.

 

살아 있는 게 무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한순간 들여 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 데는 티끌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법이리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 없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생이란 어디로부터 왔다가 죽음이란 또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멸하는 것이로다.

뜬구름 자체가 본래 실이 있는 것이 아니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진흙 소가 물 위로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는구나.

 

대자연의 위력과 역사 앞에 인간은 한낱 티끌과 같다. 러시아인이여! 이제 그만 오만의 옷을 벗어라. 그래야 오갈 수 있다. 산다는 게 무엇이냐? 오가는 것이다. 그걸 막으면 희망이 없고 미래가 없다. 러시아에 오가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도 더 강해져야 한다.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약한 나라는 역사의 제물이 되었고, 강한 나라는 역사의 주인이 되었다. 연추는 우리가 약했기에 제물이 되었다. 이것이 국제사회의 준엄한 현실이요, 우리에게 씌워진 굴레이다. 만약 우리가 강한 나라였다면 연추는 저 넓은 만주벌의 중심이 되었으리라.

 

이제라도 일어서야 한다. 과거에 머물지 말고 미래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좁은 나라에서 날밤이 새고 밝는 줄 모르고 싸움만 하여서는 우리는 아픈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의 교훈을 통하여 배워야 미래가 있을 것이다.

 

▲연추를 돌아본 후 “산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대화”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우리 일행     ©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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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04 [22:47]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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