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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러시아 연해주 답사기 5] 그리움이 아련히 다가온 연추
연해주 한인들의 얼을 찾아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8/12/08 [21:02]

우주(宇宙)라는 말속에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은 별개의 것이면서 사실은 하나이다. 그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인간은 느끼고 경험한다. 지나간 역사 또한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 속에는 무궁한 이치가 담겨있고 엄청난 의미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우주라는 울타리 속에 있는 역사와 사물이 주는 소리를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듣지 못하면 듣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았으나 마음으로 보지 못하면 보았다고 할 수가 없다. 마음으로 보거나 들으면 뜻과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아야 한다.

 

옛사람들은 사물을 보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을 관물(觀物)이라고 하였다. 즉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고, 마음을 넘어 이치로 읽을 줄 알고 볼 줄 알았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포시예트 인근마을을 휘감아 돌고 있는 것이 한 폭의 그림 같다.     © 김성윤 기자


우리는 멀리 보이는 연추를 눈으로 보고 조선의 관료 김광훈과 신선욱이 쓴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 적정을 살핀 보고서)’나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란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마음의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마치 양애희 시인이 쓴 “사랑, 그 천 개의 무색 그리움이란 시”처럼
 
아 ! 이슬 되어, 바람 되어
마음 하나 심장 깊숙이 심어
허구헌날, 온통 그리움뿐
휘젓고 돌아치고 달궈지고 몰아세우는
너는 누구더냐.
 
잊고 살자 다짐해도
혼절의 무게로 다가와
버릇처럼 세포마다 문신 새기고
내 안에 오직 너로만 퐁퐁 샘솟게 하는,
너는 대체 누구더냐.
 
눈멀어 귀멀어
붉은 꽃물 모다 모아
옴팡지게도 스미게 하는 너
사랑하고도 외롬을 질끈 동여맨
사랑, 그 천 개의 무색 그리움.
 
무딘 침묵의 어깨를 넘어
담장의 넝쿨 장미, 오지게도 달게 피듯
사랑, 그 천 개의 그리움
붉은빛으로 가슴팍에 빙빙
허구헌날, 나를 놓아주질 않는구나.
 
연해주가 좋고 하산이 좋아 이 겨울 찬바람을 이겨내며 또 다른 꿈을 꾸는 북동그룹 임하규 대표도 있다. 지난번 방문하였을 때 너무 추워 한국으로 나갔다 새봄이 되어야 돌아 올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 시간에 슬라비안카에 다녀왔단다. 그때 못 만난 아쉬움을 추억이 담긴 겨울나기 장작을 수북하게 쌓아놓은 사진으로 대신 보내왔다.

 

멀리서 이 사진을 받아보는 나는 추억을 되새겨볼 수 있어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외로움과의 투쟁이요, 열악한 환경과의 전쟁일 것이다. 그래서 임하규 대표 같은 분들이 존경스럽다는 것이다. 부디 가죽처럼 질긴 근면과 불사조처럼 끈기 있는 우리 민족의 얼을 우리를 대신하여 그곳에서 지켜주시기를 빌어 본다. 
   

▲  북동그룹 임하규 대표가 러시아 하산에서 겨울을 나기위한 난방용 장작을 집안 가득 채운 사진을 보내왔다. 이 사진을 볼수록  옛 향수가 소록소록 다가온다.   © 김성윤 기자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는 '연추아민촌도(延秋我民村圖)'가 있다. 그 지도에 따르면 연추 마을은 동서로 6내지 7리 나 되며 남북으로 27리 나 된다고 하였다. 마을 남쪽으로 ‘러시아’ 군영이 10리 거리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포시예트로 보인다.
   

▲  포시예트 항구 뒷산에서 내려다본 이 마을에서 최재형 선생이 11살 때  빅토리아호 선장 부부를 만나 그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 김성윤 기자


북쪽으로는 30리 거리의 고개를 넘어 중국의 훈춘(琿春)과 경계를 이룬다고 썼다. 오늘날의 지형과 거리가 거의 일치 한다. 당시 연추에 거주하는 주민은 237호 1,623명이라고 했다.

 

연추는 1869년(기사년)과 1870년(경오년)의 함경도에 몰아친 가뭄에 의한 엄청난 흉년에 못이긴 경원지방의 농민들이 들어와 개척한 곳이다. 당시 이 마을 가까운 군영 요새를 짓고 도로를 내기 위한 큰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와 함께 러시아의 근대 문물이 들어왔다.  

 

이곳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단순한 노동만 제공하여도 조선에서 보다는 윤택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이기에 이 연추마을 사람들은 재산이 넉넉하고 윤택하게 되었다. 
   

▲중국의 훈춘으로 가는 길이다. 사진의 오른쪽 부분 상중하 연추의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중간에 있는 다리 왼쪽으로 올라가면 연추 마을이다.     © 김성윤 기자

 

마치 이태백이 그의 사진 아래 시처럼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을 노래했던 것처럼 모두가 별천지 같았다. 


무슨 뜻으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지만,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으나 마음은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이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가니, 이곳은 별천지지 인간 세상 아니라네.

푸른 산은 말이 없으나 만고(萬古)의 책이요,푸른 시내는 줄이 없으나 천추(千秋)의 거문고라네.

낮에는 푸른 산을 읽고 밤에는 푸른 시내를 타니, 세상 밖 무궁한 즐거움을 뉘와 함께할꼬.


이를 살펴본 조선의 관료 김광훈과 신선욱은 조선인들이 물자와 돈을 풍부하게 모을 수 있는 곳이었다고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 기술하였다. 하늘도, 땅도 산도, 사람도 거리도 모두 새롭게 시작된 곳이었다. 새로운 감탄과 기쁨과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이 새로운 땅 연해주에는 이미 총 29개의 한인마을이 형성돼 2,640가구 2만313명의 한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다. 그 중 연추 마을은 237가구 1,623명이 살고 있는 큰 마을에 해당한다. 연추 마을의 237가구는 한곳에 집단을 이루면서 모여 살았던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1897년에 작성된 러시아 측 기록을 보면 이에 대한 내용이 보다 상세하게 기술되어있다.


연추 마을은 상(上)연추와(웰흐네예 얀치헤:YerkhneIanchikhe), 하(下)연추(니즈네예 얀치헤:NizhneeYanchikhe)의 두 마을로 나뉘어 있었다. 최소한 1906년에서 1907년 무렵까지 연추 마을은 상연추 와 하연추의 2개 마을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조선에서 들어온 농민들로 농촌가구가 늘어나면서 두 연추마을 중간에 중 연추 (스레드네예 얀치헤)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연추 마을을 한인들은 상별리(上別里), 중별리(中別里), 하별리(下別里)라 하여 상연추 마을, 중연추 마을, 하연추 마을의 별칭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한인 농민들이 강제 추방된 이후 상연추 마을에는 러시아 농민들이 한인 대신 들어와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한인들의 집이 사라지고 러시아 사람마저 얼마 살고 있지 않은 작은 마을이 되었다. 하연추는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한인들이 떠난 후 러시아마을로 남게 됐다.

 

그러다 1972년 극동지역의 중국식 지명을 러시아식 지명으로 바꾸면서 현재의 추카노프(Tsukanovo) 마을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 역시 사람이 산다고는 하지만 동남아의 미개(未開)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 하연추 마을 끝 부분인데 산 아래에는 돌보는 이 없는 한인들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 김성윤 기자


우리는 이곳을 돌아본 후 개인주택을 매물로 내놓은 곳으로 갔다. 내가 본 이 주택은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본 주택 중 얼마 안 되는 고급 주택이었다. 문제는 대지가 몇 평이고 언제 건립되었으며 어떤 설계도면으로 건축되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미화 20만 불에 내놓은 매물이란다.

 

설계도면이 없는 경우 배관이 고장 나면 벽을 다 헐어야 된다. 하수도가 막혀도 같은 문제가 뒤 따른다, 전기가 누전이 될 경우 온 선을 따라 여기저기 헐어야한다.

 

그런데 설계도면도 준비해 놓지 않고 매물을 소개하니 살수도 사서도 안 되는 집이다. 그것도 외국인은 주택 즉 지상권만 소유권 이전이 가능하고 대지는 편법으로 00년간 무상임대로 계약을 하여야 된단다. 
   

▲  미화 20만 달러에 매물로 나와 있는 고급스런 러시아 크라스키노의 주택   © 김성윤 기자


나처럼 원리원칙을 중심에 두고 살아온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엉터리도 이만저만 엉터리요, 주먹구구식이다.

 

우리말에 무 대포란 말이 있다. 흔히 `대책 없이 우기기만 하는 것을 지적`할 때 `무 대포`란 말을 쓴다. 포를 쏘려면 가늠자가 있어서 어디를 향하여 몇도 각도로 얼마만큼의 화약을 넣어 쏘아야 명중할지를 측정하고 재어서 방향을 맞추어 발사해야 되는데 그런 절차 없이 무조건 뻥뻥 쏘는 것이 무 대포이다.

 

목표물이 명중 할리 없다. 그래서 소리만 요란할 뿐 쏘나마나 한 대포가 무 대포이다. 러시아의 외국인 농업투자나 각종 개발 투자가 이런 식이란 생각이 든다. 장민석 유비콤(Yubikom)법인장은 러시아 법이 생각보다 촘촘하게 잘 정비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법조문이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그걸 지킬 수 있는 민도와 집행이 가능한 신뢰할 수 있는 관료가 없는데...이래서 러시아는 그 많은 자원과 그 넓은 토지를 가지고도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는가보다 라는 생각을 이곳을 둘러보면서 더욱 지울 수가 없었다. 
   

▲ 11월13일은 크라스키노의 장날이었다. 그런데 좌대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사고팔 물건이 거의 없었다. 이것이 러시아 시골의 현실이다.     © 김성윤 기자

 

▲ 한국의 두만강 회사에서 임대하여 놓은 600헥타의 농지는 황폐화 되고 방치되어있다. 그나마 있는 농기구마저 녹이 나고 고장으로 쓸모가 없게 되었다.    © 김성윤 기자
▲천혜의 자연조건을 구비한 포시예트 항구의 낡은 집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도 투자를 막고 규제가 많다. 그 이유가 뭘까?     © 김성윤 기자


나는 세상과의 대화는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고 서두에서 주장한 바 있다.


자연은 자연의 언어로 말을 하고, 역사는 사건이란 역사의 언어로 말을 한다. 종교는 깊은 종교의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야 세상과의 대화가 가능하다.

 

사건으로 이야기하는 연추에서의 한인 마을의 황폐화와 문명의 몰락이라는 역사의 소리를 들고 나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도 그 문화와 문명을 되돌리기 위해서 나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이 글이 우리 선조 한인들의 한을 푸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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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08 [21:02]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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