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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러시아 연해주 답사기 7] 포시예트 포구와 자루비노항을 보다
연해주 한인들의 얼을 찾아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8/12/20 [15:39]

포시예트의 민간 박물관은 말이 박물관이지 볼만한 전시유물이 없다. 다만 입구에 개항 158주년의 기념을 알리는 간판이 서 있고 그 안쪽으로는 오래된 대포며 탱크가 전시되어있다.

 

그 옆에 인위적으로 돌을 갈아 만든 둥그런 예술품 같은 조각이 3쌍 있었다. 누가 보아도 러시아 사람이 사용했던 물건이 아니다. 바로 우리 옛 한인들이 메밀, 옥수수, 밀, 수수 같은 곡식을 빻을 때 사용했던 연자방아이다.

 

▲ 한인들이 살았던 곳이면 흔히 볼 수 있는 연자방아를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 김성윤  기자

 

필요가 사라지면 도구는 유물이 된다더니 한인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연자방아의 아랫돌과 윗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유물이 되어 우리를 맞이하였다. 이곳 하산의 옛 한인 거주 지역을 가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옛 유물이 연자방아이다.

 

두만강회사소속 숙소 옆에도 반쯤 묻혀 있는 연자방아가 있었고 크라베 반도의 한인 주거지역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 박물관을 넘어서면 바로 포시예트 포구이다. 지난 6월에는 그 포구에서 젊은 연인들이 반나체로 선팅을 즐기는 것을 보고 아 이곳이 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아시아 속 유럽이구나란 생각이 들게 하였다.

 

이번 방문에서는 포구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포구 위쪽의 나지막한 산으로 올라갔다. 포시예트 포구를 비롯한 크라베 반도와 활처럼 휘어져 보이기도 하고 반달처럼 보이는 달미를 조망하여 보기 위해서였다. 프티찌에 호수가 수평선처럼 보여 바다 인지 호수 인지 분간이 어려운 곳에 가느다랗게 육지와 연결되어 있고 그 육지와 바다가 연결되었다.

 

▲ 멀리 보이는 육지가 달미이다. 섬 아닌 육지와 붙어 있는데 왼쪽이 바다이고 오른쪽이 육지이다    © 김성윤 기자

 

옛 우리 이름 달미는 달같이 생긴 둥근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달뫼’, ‘달미’라고 불렀다. 달미의 어원은 달은 산(山)을 의미한다. 미는 산을 의미하는 뫼나 들판을 뜻하는 매의 변형으로 보인다. 이 자리를 달집으로 삼아 불을 피우고 달맞이를 한데서 ‘달미’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탁 트인 벌판에 마을을 감싸 안은 달을 닮은 야산. 그 아래 초생 달 웃음 짓 듯 그렇게 자리한 곳을 우리의 조상들은 달미라 불러 마을의 풍경이 더 진하게 가슴속에 와 닿는다. 이곳의 달미는 외해를 막아주어 포시예트는 천혜의 항구가 될 수 있었다.

 

▲ 1860년 이곳에 러시아가 처음 입항하여 포구를 개척 하였다는 표식이 있고 옆에는 조그만 사설 박물관이 있다.     © 김성윤 기자

 

이곳에서 최재형 선생이 러시아 무역선 빅토리아호 표트로 세묘노비치 선장 부부를 만나게 되어 그의 인생이 바꾸어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진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가섭은 부처를 만나고 나서 깨달음을 이뤘다. 장미꽃의 시인으로 불리는 라이너마리아 릴케는 로댕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예술과 일생 전체가 바뀌었다고 한다. 최재형 선생도 표트르 시묘노비치선장 부부를 만나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사업으로 벌어들인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류인석(柳麟錫)이 13도 의군을 조직할 때 의병들의 총기 구입 등 무장을 도왔다.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 의사가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속에 안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끝까지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더욱 러시아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최재형도 일본의 음모로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었으나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사건 이후 러시아 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거래를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여건이 여의치 않아진 최재형은 한 초라한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20년 러시아 내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최재형의 나이 63세였다. 현재 그의 손자 최발렌틴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며, 최재형의 사진과 관련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최재형 선생이 러시아 무역선 빅토리아호 표트로 세묘노비치 선장 부부를 만났다는 그 지점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알아낼 수가 없었다.

 

▲ 포시예트 포구 뒷산 언덕에서 본 아름다운 포시예트 항구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 김성윤 기자

 

대신 지난 6월에 왔다가 멀리서만 보아야했던 언덕보다는 높고 산이라고 하기는 너무 낮은 뒷산으로 가서 달미를 조망하면서 정호상 선교사님으로부터 선교차 이곳으로 오던 선교사님이 달미 해역에서 순교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1918년에 박노기 목사는, 김희서 교사와  전영태 총찰, 최응선 감로와 함께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들을 수행하는 제직들과 함께 러시아 연추와 이지미 인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배를 탔다. 이들이 탄 배는 러시아를 향하여 순항하였다.

 

유라굴로 향하던 배가 보시엘해 모커우 해역(달미해역)에 들어서자 심한 풍랑으로 배가 순식간에 풍랑과 맞서게 되었다. 거센 풍랑으로 목선이었던 배는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지고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파도 속으로 떠밀려 목숨을 잃었다.  목적지 포시예트를 눈앞에 두고 일어난 비극이었다.

 

이 순교 소식이 다음날 러시아 남부 연추일대에 알려지자 “러시아의 거주 한인들을 위해서 전도하러 오다가 희생되었으니 우리들도 기독교인이 되어서 선교사님들의 순교의 희생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자” 면서 그때 까지 신앙이 없던 사람들마저 하얀 옷을 입고 슬픔을 함께 하였는가 하면 이후 교회에 나온 신도가 많아졌다는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하여 지고 있다.

 

이날 순교하신 김희서 교사는 45세가 되는 생일날이서 오늘날 까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네 분의 순교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이분들의 순교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정호상 선교사님이 배가 풍랑을 만났다는 그 바다를 가리키며  설명하여 주셨다. 마치 이해인 시인이 쓴 “아침바다에서” 란 시를 읽는 것처럼...

 

아침바다에서

-이해인-

 

금빛 번쩍이는 욕망의 비늘을 털고

당신께 가겠습니다.

 

밤새 침몰했던 죽음들이

흰 거품 물고 일어서는 부활의 바다

 

황홀한 아침을 全身(전신)으로 쏟아 내는

당신 앞에 나는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숙명의 파도입니다

 

승리의 기를 흔들며 오실

당신을 위해 빈 배로 닻을 내린 나의 생애

 

수평선을 가르며

춤추는 갈매기로 가겠습니다.

 

내력을 묻지 않고 보채는 내 마음을 안아 주는 바다

영원이 흰 泡沫(포말)로 일어서는 바다로 가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포시예트항구는 이곳에서 생산된 석탄을 실어 나르는 항구 역할로밖에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물류 기지였다. 

 

▲ 항구에 석탄을 수북하게 쌓아 놓은 상태에서 어디론가 보내기 위하여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 김성윤 기자

 

이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자루비노 포구가 있다. 자루비노( Zarubino)는 러시아 연해주의 항구도시로 1928년 10월18일 개항하였다. 엔지니어 이반 이바노비차 자루비나의 이름을 따서 자루비노로 명명하였다. 하산스키 군 포시예트 만에 있다. 연해주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20km 남쪽으로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해로로 105km 남쪽에 있다.

 

▲  자루비노( Zarubino)는 러시아 연해주의 항구도시로 1928년 10월18일 개항하였다.   © 김성윤 기자

 

도시 타입의 정착촌은 1940년대에 만들어 졌으며 인구는 1989년 5,206명 이었으나 매년 줄어들어 현재는 2000명 내외이다. 전체 인구의 절반은 자루비노 항에서 일하고 있으며 절반은 수산물 기지에서 일하고 있다.

 

자루비노의 경제는 생선공장과 철도로 연결된 항구로 전형적인 시골포구이다. 이곳으로 가끔 북한난민의 배가 밀려 올 때도 있다. 그 만큼 북한과도 가깝다.

 

속초와 정기 여객선이 운행되었으나 동절기엔 운행되지 않는다. 속초에서 자루비노 항까지는 출항에서 입항까지 585km의 거리에 총 17시간이 소요된다. 역으로 자루비노에서 속초까지는 총 16시간이 걸린다. 그 이유는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보인다.

 

하절기인 6월 22일에서 9월 3일까지는 매주 3회(화, 목, 일) 출항하며, 동절기인 9월에서 5월까지는 매주 2회(월, 목) 운행을 한다. 여름에는 속초와 자루비노, 훈춘이 모두 2시간, 겨울에는 훈춘이 2시간, 자루비노가 1시간 한국시간보다 빠르다. 동절기에 한국의 8시는 자루비노 현지 시간으로는 7시이다.

 

주변도시간의 항로와 육로 거리를 보면 자루비노에서 훈춘까지는 63km 로 자동차로 3시간이 소요된다. 자루비노와 블라디보스토크는 해로로 104km로 여객선으로 1시간30분소요 된다고 한다.

 

훈춘에서 연길은 116km 자동차로 2시간 걸린다. 연길에서 백두산까지는 180 km로 자동차로 3시간 걸린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서 18km 떨어져있는 자루비노항은 향후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된다면 또 다른 화물기지로 조성될 것이다. 이는 동북아 물류흐름을 만들어 내는 물류허브 항만이 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  중국 훈춘-러시아 극동 연계교통망. 자료=북방경제협력과 자루비노,  항의 전략적 위상, 그리고 향후 전망. 제공=한국교통연구원 북방경제연구단장/ 선임연구위원 안병민 재인용   © 김성윤 기자

 

만약 북한이 비핵화 길로 나아간다면 동북아 물류 허브로 부상할 나진항 및 나진·선봉 경제특구와도 가깝고 북한, 중국, 러시아 3국 접경도시인 지린성 훈춘과도 근접해 있어 잠재적 개발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자루비노 항은 동북 3성의 자원과 극동 북부에서 생산된 곡물이나 일반화물, 석탄과 철광석 같은 것을 중국 남부로 보내는 물류기지 역할도 가능한 지역이다. 한국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동북2성으로 보낼 수 있다.

 

이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백두산에서 생산된 생수를 현재는 다롄으로 보내고 이를 다시 평택이나 부산항으로 보내고 있다. 만약 자루비노 항을 개발 한다면 생산한 물을 훈춘으로 보내고 훈춘에서 자루비노 항으로 보낸 다음 속초항으로 보내게 되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줄어들게 된다.

 

또한 항만과 연계된 다양한 사업에 북한의 참여를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찾는 사람도 오고가는 화물선도 거의 보이지 않은 한적한 포구로 머물러 있다. 물류가 없기에 채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자루빈스크(Zarubinsk) 함대 기지에는 낡은 어패류 채취선 한 척이  놓여 있었다.     © 김성윤 기자

 

항구의 앞쪽은 전에 자루빈스크(Zarubinsk) 함대 기지이었었다. 현재는 소규모 어패류 양식 및 가공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로 가리비, 해삼, 홍합 등의 해산물의 1차 가공공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본 건너편 자루비노 항구는 시골의 한적한  어촌처럼 보이는 너무 평온하고 조용한 휴양지 항구쯤으로 보였다. 자루비노 항과 자루빈스크 함대기지는 바다를 메워 육로로 연결시켜 놓았다.

 

 

▲ 자루비노 항과 자루빈스크 함대기지를 바다를 메워 육로로 연결시켜 놓았다.     © 김성윤 기자

 

그 길에서 본 육지와 바다는 활처럼 휘어져 아름다운 해변을 만들고 있었다. 해변에 흩어진 검은 몽돌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또 하나의 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무튼 19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여도 우리 한인들이 이곳을 개척하여 사람이 사는 땅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모든 문화와 문명은 사라져 버리고 러시아 사람이 가끔 오가는 시골 마을로 변해 있었다.

 

▲ 우리를 안내 하였던 정호상 선교사님이 오석이 깔린 해변에서 저 멀리 북한을 가리키고 있다.     © 김성윤 기자

 

이 같은 문명의 몰락 이유는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우리나라가 강하지 못 하고 우리민족도 강하지 못한데 있었다.

 

주역(周易)에는 “하늘의 운행은 건장하니 군자는 그것을 본받아 스스로 강건하여 쉼이 없어야 한다(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는 말이 나온다. 이 말속에는 ‘평생 쉬지 않고 스스로 연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핵심이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자강 즉 '스스로 강해진다'는 말의 또 다른 뜻은 '변화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끊임없이 세상의 변화를 항시 예의 주시해야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강해지려면 그에 걸맞게 변화해야 한다. 그럴 때 기회가 찾아온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한다. 그러나 우리 한인 선조들은 이곳 연해주까지 이주해온 것은 세상의 변화를 바로 보고 왔다.

 

그런데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멈추어 버렸다. 세상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대응방법을 모색해야 되었는 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스탈린의 집단 추방으로 이어졌고 결국 연해주문명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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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20 [15:39]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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