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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러시아 연해주 답사기 8] 연해주 한인 삶의 중심지 아디미의 향수
연해주 한인들의 얼을 찾아서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8/12/28 [23:15]

바라바쉬 휴게소에서 1시간 남짓 남쪽으로 달리면 하산군의 군청 소재지 슬란반카 군 소재지가 있다. 이곳에서 아지미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차를 타고 가면 30분 이상 걸리는데 걸어서 산을 넘으면 바로 뒤 서남쪽에 아지미(芽芝味) 마을이 있었던 곳이 나온다.

 

아지미 마을은 국가도 없고 민족도 없었던 그 옛날 오직 생존만 있었던 때부터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었다. 우리 한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보람 있게 살았다. 행복한 삶을 영위한 결과 건강한 몸, 밝은 얼굴이 한인임을 각인시켜 놓았다. 훈훈한 정과 맑고 밝은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한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그들이 오갔던 길이 있고 마시던 우물터가 있으며 살았던 집터가 있다.

 

그 흔적으로 이 지역의 번영의 정도가 어땠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온전한 가옥 한 채 없는 전설의 마을이 된 채 사람이 오간 흔적만 외롭게 길의 형태로 남아있는 그 아지미 마을을 나는 지난 6월에 이어 11월에 두 번째로 방문하였다.

 

▲ 해양공원으로 지정된 아지미강,  온전한 가옥 한 채 없는 전설의 마을이 된 하 아지미 마을이 있었던 포구 모습   ©김성윤 기자

 

아지미란 이름이 '아주머니'의 강원도나 경상도 지방의 사투리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슬란반카의 뒷산에서 보면 해안이 어금니처럼 울룩불룩 나왔고 뒤쪽으로 널따랗게 펼쳐진 평야를 등진 산들도 이빨모양이 많아 어금니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거나 이 추운 곳에서도 새싹이 뽀쪽뽀쪽 잘 돋아나는 지역임을 빗대어 어금니 아(芽)자를 붙여 만든 이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의미 부여는 내 생각일 뿐 학술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아지미는 1872년 조선으로부터 이주해온 주민들이 처음 개척한 땅임에는 틀림없다. 이 아지미 마을은 우리가 흔히 윗동네 아랫동네로 표시 하듯이 이 마을 또한 러시아 말로 베르흐네(上)란 러시아의 상이란 뜻으로 앞에 붙여 상 아지미가 되었고, 니즈네예(下)는 러시아 말의 하란 의미이므로 이를 붙여 하 아지미 등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로 위 아지미 아래 아지미이다.

 

18세기 중국의 역사지리서에는 하치미(Khatszimi)로 표기돼 있었다고 한다. 그 이름을  러시아 지도에 그대로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아디미(Adimi)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지미가 아디미로 표시되게 된 것은 러시아의 발음 중 "ㅈ" 보다는 "ㄷ“의 발음이 더 쉬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지미란 이름과는 달리 이곳으로 이주했던 조선의 농민들은 이 지역을 상농평, 하농평으로 불렀다고 한다.

 

▲  아지미 강과 포구는 한적한 시골을 연상 시키나 집한 채 없는 인적인 끊긴 황폐한 지역이다.   © 김성윤 기자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산에서 내려다본 바닷가와 연해있는 부분 일대가 하(下) 아지미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돌며 그림처럼 흐르는 강이 우리말로 아지미강이고 러시아 이름으로는 포이마(Poima)강이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다와 붙어있는 아지미강 하구로부터 4km에 걸쳐 그림처럼 포구를 따라 강이 구불구불 마치 한 마리 큰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흐른다.

 

▲  아지미 강 하구로 부터 4km에 걸쳐 큰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흐르고 강 옆에는 오솔길이 아직도 남아있다.   © 김성윤 기자

 

사람의 손길이 50년 동안 닿지 않아 공기, 물, 토양환경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그래선지 공기가 매우 상쾌하다. 거기다 동해의 바다내음이 상큼하게 콧등을 스친다. 더구나 청정한 동해와 연해 있으나 양식장도 어선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더 고즈넉하고 조용하다.

 

이 아름다운 청정 지역의 주인은 여러 동식물이다. 그래서 희귀한 어류와 민물고기 그리고 해산물이 풍부하다. 특히 이곳은 연어의 산란 지역이므로 계절 따라 연어가 아무 제약 없이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마치 송하선 시인의 “연어에 관한 명상”처럼

 


연어에 관한 명상
-송하선-
 
어부가 바다를 향해 떠나는 건
만선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연어가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도
만삭이 되어 돌아오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우리가 아침에 떠나고

우리가 저녁에 돌아오고
우리도 연어처럼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지만,
 
우리가 세상을 향해 떠나는 건
빈손이 되어 돌아가기 위함이다  
우리가 내일을 향해 떠나는 것도
빈손이 되어 돌아가기 위함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학교가 생기고 믿음을 위한 예배당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곳에도 대략 1885년부터 예배소와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남부 연해주 한인사회의 행정과 문화 그리고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등의 중심기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기록에만 나와 있을 뿐 지금은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었던 부서진 다리와 사람이 거주했던 집터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슬라반카야 뒷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한인들이 스탈린에 의하여 강제 이주되기 전 산을 돌아 해안가로 접근하였던 길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발아래 산이 멈추어 있는 곳에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슬라반카야로 오갔던 샛길이 분명하게 보인다.

 

1870년대 한인 이외에는 이곳에 거주했던 사람은 없었다. 다만 러시아 제10동부 시베리아 보병대대 소속 하사관과 12명의 병사가 상시 배치되었던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황량한 자연 상태의 땅이 되어 있었다.

 

▲ 답사단이 그 옛날 영화는 사라지고 인적이 끊긴 아지미 마을의 재건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 김성윤 기자

 

 우리가 보고 거닐었던 하(下) 아지미 평야로부터 뒤로 돌아서 도로를 건너고 강을 따라 1.5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상(上) 아지미이다. 러시아 하산군의 대외협력부장의 개인 땅이 3000평 있다고 지적한 곳으로 추정된다.

 

우리 답사단이 보았던 상·하 아지미가 자리 잡고 있는 포구의 동서길이는 약 16km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잦은 홍수로 수시로 지형이 바뀌기 때문에 정확한 길이는 실측을 해봐야 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남북 폭은 2km정도 된다고 하였다.

 

이 땅에는 1906에서 1907년경 상아지미에 52가구 326명의 한인이 거주하였으며 하아지미에는 63가구 438명의 한인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곳이 중요시 되는 이유는 1893년부터 한인들의 국적 취득이 가능해진 이후부터이다. 그로부터 한인 수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를 총괄하고 관리할 조직인 한인자치행정 도회소가 설치되었다. 당시 이곳 남부 연해주에는 두 개의 도회소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둘째 날 가보았던 연추마을의 남도소(南都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아지미에 있었던 북도소(北都所)이다.

 

▲ 한인들이 아지미 마을에서 슬란반카 군소재지가 있는 곳까지  오가던 오솔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 김성윤 기자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 직후에 아지미에는 22개나 되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보다 오래된 연추도 10개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은 연추보다 거의 2배나 되는 큰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한인민회도 조직될 수 있었다.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 6월까지만 하여도 연추와 아지미에는 한인민회 본부가 있었다. 그 아래 각 마을에 지부가 설치돼 자치행정을 실시했었다고 한다.

 

2018년 6월과 11월에 둘러본 아지미는 폐허나 다름없는 황량한 들판과 강물만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1937년 강제이주로 한인들이 떠나면서 러시아 마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관리할 능력도 농사를 지을 기술도 없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은 이어지고 있다.

 

아마 한인들이 들어가지 않는 한 100년이 되어도 천년이 되어도 지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바꾸어 놓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마을이름 정도다. 그 이름이 상아지미는 포이마(Poima)로, 하아지미는 로마쉬카(Romashka)로 그것도 1972년에야 새 이름을 붙여 놓았다.

 

이렇게 형성된 아지미나 연추로 우리 한인들이 이주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아야만 이곳에 왜 한인들이 많이 살게 되었고, 왜 우리 민족의 중요한 삶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논어에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의 의미는 '생각 없이 배우기만 하는 사람은 어리석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사람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뜻이다.

 

아지미를 방문하여 과거 경험을 통하여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미래 설계일 것이다.

 

▲ 아지미 뒷산은 나무가 없는 끝없는 초원으로 이루어져있다. 방목농장으로 사용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 김성윤 기자

 

1860년에 러시아 정착민들이 포시예트 마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1년 후인 1861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설립하였다. 남우수리 지역의 합병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은 조선왕조 당국의 통제를 벗어난 5400명의 고려인 정착민을 연해주에서 발견하였다.

 

이후 그들은 러시아 국영 농민으로 등록되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이 많은 고려인이 이곳을 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유추해 낼 수 있다.

 

조선왕조는 1876년(고종13년 음력 2월 3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나라의 살림살이는 날로 어려워져갔다. 일본에 대한 문호가 열리자 일본 상품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상품이래야 양철이나 양잿물, 고무신 등의 신문물이다. 그걸 서로 사려고 생명줄인 식량을 마구 내주었다. 그것도 양반네가 앞장서서 구입하였다.

 

여기다 민비 척족들의 무분별한 국고 낭비는 도를 더해 갔다. 관리들은 앞 다투어 제 몫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백성은 어찌 살든 알 바 아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골병이 들든 말든 관리들은 착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죽어나는 건 백성들이었다.

 

▲  위 사진의 아래 조그맣게 쓰여진 러시아 글에는 블라디보스톡 한국인 마을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독일어로 쓴 “Im Koreanerdorf bei Wladiwostok” 는 블라디보스톡의 한국인 마을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 김성윤 기자

 

왜냐하면 이중 삼중의 조세를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는 쌀을 중심으로 한 물물 교환사회이었는데 일본으로 과다하게 쌀을 수출하다 보니 연일 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쌀값이 치솟다 보니 다른 물가도 덩달아 따라 올랐다. 이미 국고는 텅 비어버렸다.

 

관리와 군인들의 급료마저 줄 수가 없었다. 수개월씩 급료를 받지 못한 관리들이 의존할 곳은 착취밖에 없었다. 이 지경까지 갔지만 백성들의 구제나 생활고에 대한 구혈은커녕 착취에 대해 호소마저 할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은 관과 민이 따로 놀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서로가 원수같이 지내는 세상이 되었다. 특히 안으로는 집권자였든 민비 척족에 대한 불만과 밖으로는 일본에 대한 배척이 비등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을 보호하고 돌보기보다는 가혹한 착취를 일삼는 집권층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상품의 도입과 백성이 먹고 사는 쌀의 수출로 인한 경제의 파탄은 일본을 증오하면서도 그들의 물건을 구매하였다. 국론의 분열과 기강의 혼란을 넘어 사회 전체가 위기의 순간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민비는 순종의 세자 책봉을 위하여 막대한 국고를 탕진하고 있었다. 어린 세자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명산이나 큰 강을 찾아 굿판을 벌리기도 하고 기도를 올린다며 아낌없이 국고를 탕진하였다. 나랏돈은 국고라기보다 민비네 호주머니 돈이 되어버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민비는 세자의 건강을 기원한다는 명목 아래 금강산 1만2000봉우리마다 1000냥의 돈과 쌀 두 가마니, 한 필의 포를 공양하였다. 그렇게 탕진한 재물만 해도 돈 1200만냥, 쌀 2만4000가마, 포 1만2000필이나 된다.

 

이 돈이 얼마나 큰돈이었는가는 당시의 국가 재정 수입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돈으로 거둔 세금은 150만냥 이었고 쌀은 40만 가마니, 포는 2000동 내외 정도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민비가 금강산에 공양한 것이 얼마나 큰 국고의 낭비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정 안에서도 무당이나 점쟁이를 비롯한 시정잡배까지 끌어들여 풍악 소리와 웃음소리로 궁정 안은 날이 밝고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조선의 민초와 궁중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민비는 점보는 점쟁이나 춤 잘 추는 무당을 보면 수천 수만금을 아낌없이 퍼 주었다. 그 돈은 하늘에서 어느 날 떨어진 것이 아니고 국고에서 빼낸 것이거나 아니면 부당하게 거두어들인 뇌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라를 경영해도 아무 탈이 없다면 오히려 그 나라가 이상한 나라일 것이다. 윤병무의 <인성(人性)의 비교급>이란 시를 보면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보는 것이 진실이다. 란  아래 시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민족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다.

 

윤병무 시인의 인성(人性)의 비교급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게 낫고

정의로운 것 보다는

착한게 낫다

 

하지만 사상체질도 두 가지쯤 섞여 있듯이

인성도 짬짜면이라 탄식이 이어진다

 

정의롭지 못한 영리함의 저속함이여

영리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허망함이여

착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역겨움이여

정의롭지 못한 착함의 막연함이여

 

그럼에도 굳이 하나만 골라 비교하자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보는 것이 진실이다

 

역사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를 말할 수도 있고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아지미에서 한인들의 삶을 조명해 봄으로써 사실로서의 역사 앞에 어느 정도 다가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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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28 [23:15]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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