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종합뉴스 > 기획특집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속 러시아 연해주 답사기 12]가까운 나라, 이웃도시 블라디보스톡
연해주 한인들의 얼을 찾아서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9/01/25 [22:09]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는 '동방(восток, 바스똑)의(지배하다 - владеть 블라제쯔 에서 파생)지배자'라는 뜻의 러시아어인데 두 단어를 합쳐 '동방을 정복하다'란 뜻이다. 구소련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었던 군사기지였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개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 개방정책으로 1991년부터 외국인에게 개방되면서 이제는 러시아 개방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러시아 연해주 주도인 블라디보스톡은 모스크바를 잇는 9,288km 시베리아횡단 열차의(지구 둘레의 4분의 1에 가까운 거리)시발역이 있는 곳으로 면적은 331㎢ 이며 이 중 97.8㎢가 루스키 섬이다. 위치는 피테대제만(灣)을 접한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반도(半島) 및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있다.

 

기후는 해양몬순으로 연평균 온도는 +4.9℃ (1월: -11.3℃, 8월: +20.8℃)이다. 이 넓은 대륙의 연해주 주도 블라디보스톡 인구는 60만7000명이다. 경제현황을 보면 러시아 극동지역 최대 경제도시로 제조업(자동차, 조선, 선박수리, 식품 등), 교통, 물류, 농업, 관광서비스업, 광업, 건설업 등이 발달되어있다.

 

기업은 4만6000여 개가 활동 중이며(이중 약 60%가 연해주 본사), 이중 민간기업이 93%나 된다. 둘러 보아야 할 명소로는 전망대(독수리둥지), 아르세니예프 박물관, 연해주 국립미술관, 중앙광장,  블라디보스톡 요새, 블라디보스톡역(시베리아횡단열차 종착역), 태평양함대사령부, 기념관(영원의 불꽃), 해변공원(나베레즈나야), 루스키섬 등이 있다.

 

▲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으로 전망대에서 본 밤의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 시내의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737미터 길이의 금문교의 불빛은 휘황찬란하다.( 2018 Expedia, Inc. / Expedia Southeast Asia Pte Ltd / AAE Travel Pte Ltd. All rights reserved. 제공사진)    © 김성윤 기자

 

▲ 낮에 본 금각교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독수리 전망대에서 본 블라디보스톡 시내.    © 김성윤 기자


블라디보스토크 하면 떠오르는 것이 푸른 바다와 천혜의 만에 둘러싸인 해안 도시이다. 바로 그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전망대(독수리둥지)이다. 언덕은 214m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곳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다.

 

전망대 상층에는 러시아 키릴 문자를 창제한 키릴 형제 동상이 있으며, 그 아래 전망대에서 금각만과 아름다운 금각교를 내려다보며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이 전망대에서 보는 경치는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운치와 낭만이 있다.

 

언제 찾아와도 탁 트인 시원한 바다와 항만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 가지 흠이라면 바다와 연해 있어 바람이 강하게 부는 편이다. 아래는 절벽이거나 낭떠러지이기 때문에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하며 관광을 할 경우에는 모자나 소지품이 날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러시아 키릴 문자를 창제한 키릴 형제 동상 아래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함께한 일행    © 김성윤 기자


블라디보스톡에는 현재 재외국민이 2018년 기준으로 약 430명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상사주재원, 개인사업자, 선교사, 유학생 등이다. 주요 교민단체로는 연해주한인회, 연해주지상사협회, 연해주선교사협회, 연해주유학생회 등이 있다. 그 밖에 고려인동포가 약 3만 명이나 거주하고 있다.

 

동포단체로는 우수리스크민족문화자치회, 연해주고려인협회, 연해주다민족문화센터, 연해주한인이산가족협회 등이 있다. 러시아에 사는 한민족을 러시아 교민들이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고려인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그 내력부터 살펴보겠다. 그 어원이 생겨난 된 경위를 살펴보면 왜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 이해 가기 때문이다.

 

원래 고려인을 조선인으로 부르다가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8년 6월 구소련 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도 아닌 소련 사람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 역시 1세기 이상 지나는 동안에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는 크게 달라져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특성을 많이 띠고 있는 문화로 양쪽 문화와는 크게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와도 다른 자신들만의 특수한 독자적 특성을 이어오고 있다. 그 결과 어느 쪽도 아닌 '고려인'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중 가장 이국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르바트 스트리트이다.( 2018 Expedia, Inc. / Expedia Southeast Asia Pte Ltd / AAE Travel Pte Ltd. All rights reserved. 제공사진)    © 김성윤 기자


고려인이 아직도 3만 명이나 살고 있는 연해주의 주도인 블라디보스토 아르바트 거리는 일명 ‘예술의 거리’라 불리기도 한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가장 활기 넘치고 볼거리가 많은 아르바트 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고 싶었는지 거리 이름까지도 똑같이 지어 만든 거리이다.

 

이 거리 곳곳에는 예술가들의 낭만이 물씬 풍기고 있다. 이곳에서 해양 공원과는 아주 근거리에 있다. 걸어서 15분 정도면 해양공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 분수대 바로 앞이 해양공원이다. 해양공원은 바다를 테마로 한 공원으로, 해양 도시로서의 블라디보스톡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여름이면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잔디 위에서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다.     © 김성윤 기자


걸어가는 동안 건물 사이사이에 배어있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 같다. 바다를 향해 툭 터진 길은 금각만 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고려인이 이곳에 오고 살았던 과정과 현재 사용하고 있는 호칭을 살펴보겠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한반도의 분열이 낳은 특수한 역사적 산물로 나타난 이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한국의 고려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이미 앞에서 수차 언급한 바와 같이 19세기에 조선은 국정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틈을 타서 소수의 양반들이 대다수 토지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견뎌낼 수 없었던 가난한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청나라 동북지방인 만주나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하게 된다.

 

한편 1860년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다. 이 때 러시아가 중재한 댓가로 청나라로부터 아무르강 동쪽의 땅을 러시아는 거저 얻는다. 당시 청나라와 러시아는 국내 사정으로 행정력이 이 지역에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다. 할 수 있는 조치는 봉금령이나 출입금지령 정도였다. 이 같은 조치는 한참 후인 1880년대에 철폐되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조선 정부도 자국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하였지만 역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와중에 함경북도 경흥 출신 양응범과 무산 출신 최운보가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1863년 12월경에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지신허 마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 이들의 뒤를 이어 많은 농민이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까지 한인들의 새 삶의 정착지로 자리 잡아 갔다.

 

▲  중앙광장 또는 혁명광장으로 구소련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병사들을 추모하는 기념물 아래에 선 우리 일행   © 김성윤 기자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제1차 강제 이주는 우수리스크의 인근에 있는 라즈돌노예 역에서 시행되었다. 그 후 남아있던 고려인들을 혁명광장에 재집결시켜 추방하였던 한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광장이 혁명광장이다. 우리 고려인들이 이 혁명광장 바로 옆에는 있는 블라디보스톡 역을 통하여 여러 차례 강제추방 열차에 탑승했다.

 

1차 추방 이후 멀리 어업에 나갔던 어부나 상업에 종사하였던 관계로 이곳을 떠나있던 상인 등 남아있던 고려인들을 여러 차례 기차에 실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역이다. 이 역 옆의 원래 광장 이름은 블라디보스톡 중앙광장이었다.

 

현재도 국경일 행사가 이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토요일에는 재래시장이 열려 우리의 시골 장터에 온 느낌을 주는 곳이다. 고려인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던 곳이기에 겨울에 이곳에 와보니 쌀쌀한 날씨보다 더 가슴이 메이고 한기가 엄습하여왔다.

 
숫타니파타는 고 법정스님이 번역한 최초의 불교 경전이다. 이 책의 게송 71번에 나오는 '무소의 뿔 ...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있다. 작은 짐승은 항상 두려워하기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심하게 마음이 요동친다. 그러나 사자는 다른 짐승의 소리를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거망동하여 스스로 목숨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성경 이사야 41:10-13에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 이라고 나와 있는데 우리 한인 선조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곳으로 이주하여 왔다. 이상의 별을 보고 희망의 별을 찾아왔다. 영원의 별을 노래하며 비탈지고 황량한 이 땅을 사람이 사는 땅,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는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우리 선조 한인들이 일구었던 광야를 지난 5일 동안 달리며 그분들의 호연지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연해주 가나안 유한공사 이원석 법인장, 하산의 임하규 북동그룹 농장대표, 장민석 유니콤 법인장에게서도 한민족의 불굴 정신, 이웃을 사랑하는 측은지심의 정신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시베리아의 광야를 달리며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새기며 우리 민족의 정신 속에 흐르는 호연지기를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어받아 대륙으로 더 많이 진출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블라디보스톡 혁명광장에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그려 놓아 관광객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 김성윤 기자


1869년에는 조선인이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의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기 이전에 극동 러시아의 조선인은 러시아인보다 많았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러시아 지방 관리들은 그들에게 귀화를 종용하였다.

 

1897년의 러시아 제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전체에서 조선말을 하는 사람들이 2만6,005명(남자 1만6,225명, 여자 9,780명)이었다. 이 숫자는 더욱 불어나 1902년에는 3만2,000명을 넘었다. 여러 지역에 고려인 마을과 고려인 농장이 생겨났다. 1900년대 초에는 러시아와 조선 모두 일본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 러시아 내 1937년 강제 이주 전까지 고려인이 살았던 마을     © 김성윤 기자


청일전쟁 이후인 1903년 8월에 진행되기 시작한 차르 정부와 일본 간 협상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내놓은 요청안은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가 관활하고 남쪽은 일본이 관활 하는 분할 통치 안을 역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도 서로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아 결렬되었다. 협상 결렬 후 일본은 러시아가 향후 전략적 이익의 관철 때문에 전쟁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1904년 러시아와의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한편 대한제국은 열강의 묵인 아래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일본이 강요당하는 등, 독립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1907년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종료되면서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인을 배척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1910년 조선왕조는 외교권을 상실한 채 일본 영토로 강제 합병되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연해주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한 피난처로 부상되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위 지도에서 고려인이 살았던 마을에서 보는 것처럼 처음에는 조선과의 국경근처에 생겨났던 마을이 점차 내륙으로까지 뻗어 나갔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시베리아와 연해주 아니면 만주로 피신하였다. 위 지도에서 본 마을들은 직간접으로 그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소련의 시베리아 지역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의 터전을 이 지역에 마련하였다. 1919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모인 조선의 지도자들이 3·1 운동을 지원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다.

 
전한 7대 황제인 무제 때 중앙 정권에 대항적인 입장을 취했던 왕족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 ? ∼ B.C.122)은 문하 식객의 도움을 받아 많은 서책을 저술하였다. 그중 특히 도가사상을 중심으로 엮은 회남자(淮南子)에는 축록자 불견산(逐鹿者 不見山), 확금자 불견인(攫金者 不見人)라는 글이 실려 있다.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켜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위 말처럼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독립유공자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는지? 연해주의 고려인 삶의 터전을 돌아보는 동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다시 한번 그분들의 거룩하고 숭고한 뜻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 3·1 운동 전후 1910~1920년대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들 중심으로, 역사 기록물에 남은 독립군과 정부, 계몽 단체    © 김성윤 기자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 정부, 중국 상하이의 상하이 정부 등 비슷한 시기에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곧이어 혼선을 줄이고 강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 상하이를 근거지로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됐다. 이 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다.

 

100년 전 연해주 곳곳에 흩어져있던 마을들에서는 독립군에게 먹을 것을 조달해 주었으며 병기를 비롯한 병참 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은 미국에 패배한다. 소련도 8월 폭풍 작전을 통하여 일제를 제압한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대한제국은 해방을 맞이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한반도는 일본 통치에서 벗어났지만, 남북으로 다시 갈라지고 만다. 이러한 민족적 비극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이 전쟁 역시 좌우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한 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한반도의 남쪽은 자유민주주의로 북쪽은 공산주의로 갈라져 1990년까지 대한민국은 소련과 국교마저 단절된 상태에서 55년을 살아야 했다.

 

이 기간에 동서 냉전이 절정기에 달해 대한민국은 1980년 소련에서 개최하였던 모스크바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1983년 대한항공 007편의 격추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대한항공도 1988년 이전까진 소련 영공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을 벗어난 것은 1990년 9월 30일 한·러 국교가 정상화 되면서부터였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며 연해주의 한인 마을과 기업의 농장을 둘러보고 시내를 보아야 러시아를 더욱더 깊이 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  율 브리너석상, 율 브리너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한 관계로 만주와 조선, 일본, 프랑스를 오가며 살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율 브리너의 생가 앞에 있는 그의 석상이 외롭게 서 있다.   © 김성윤 기자


러시아는 오랜 공산주의를 지향했던 관계로 아직도 러시아 하면 왠지 으스스하고 섬뜩할 정도를 비정상적인 국가란 생각부터 난다.

 

"이 세상/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구경을 하네." 란 일본의 하이쿠 시인 잇사(一茶)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모든 인생은 위태로운 곡예인데 영토문제에서 만은 탐욕적이고 전투적인 러시아인들은 지옥의 지붕 위에서 광란의 탱고를 추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땅에서도 우리 한인 선조들은 뿌리를 내리고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

 

이런 정착과정을 상상할 때마다 산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대화란 생각이 든다. 현실은 우리가 굳건히 디디고 사는 땅이요, 사회이다. 그곳에 이상이 없다면 희망이 없다. 진보가 없다면 도태가 기다릴 뿐이다. 노력이 있고, 보람이 있고, 행복이 있는 이상사회를 만들고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한인 선조들의 땀과 눈물이 묻어있는 연해주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곳인가 보다.

 

▲러시아 정교회 앞에 제2차 세계대전 병사들의 부조가 있는 곳으로 일명 꺼지지 않은 불꽃(영원의 불꽃)     © 김성윤 기자
▲ 벨르이돔(White House)이라 불리는 연해(Primorskiy) 지방 주정부 종합청사    © 김성윤 기자
▲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해 싸운 병사들을 기념하는 동상이 있는 혁명전사 광장    © 김성윤 기자
▲  해양공원에는 놀이기구와 오락거리 및 먹을거리가 많이 있다. 이 사진은 해안의 동남쪽에서 동북쪽의 아지무트 호텔을 바라본 정경   © 김성윤 기자

 

▲ 아지무트 호텔 아래 도로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블라디보스톡 해양 공원과 분수대    © 김성윤 기자
▲  루스키섬에 가서 옛 소련군 해양 수비벙커를 둘러보고  쪽빛 바다가 아름다워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 김성윤 기자

▲블라디보스톡 루스키섬의 어느 호프집에 들렸더니 맛있는 보드카라며 한잔 들고 가라고 권한다.     © 김성윤 기자
▲ 루스키섬의 푸른 숲속 언덕에서 바라보니 블라디보스톡의 금각교가 멀리 아련히 보인다.(이 사진은 지금으로 부터 3년 전 2015.7.16 촬영한 것이다.)     © 김성윤 기자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기사입력: 2019/01/25 [22:09]  최종편집: ⓒ ggdaily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