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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조 칼럼] 다산(茶山)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한국의 선각자이며 세계적인 사상가, 다산 정약용!
 
권해조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21/02/03 [09:12]
▲ 권해조 예비역장성, 한국국방외교협회 고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조선 후반기인 정조와 순조 시대 유학자요 실학자이다.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甫), 호는 다산, 사암(俟菴), 삼미(三眉)이며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고, 시호(謚號)는 문도공(文度公)이다.
 

 그는 1789년(정조13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포항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으로 이배되어 다산초당(草堂)에서 18년을 지내면서 많은 글을 썼다. 1818년 57세로 풀려나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으나 지난날을 뉘우치고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와 학문과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

 

 필자는 다산의 출생지이며 관직에서 물러나 머물렀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기념관과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도 몇 차례 방문하였다. 남양주시에 있는 기념관은 <경기도 기념물 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다산의 생가 여유당(與猶堂)과 묘역, 사당 문도사(文度祠), 다산기념관과 관리사무소가 있다.

 

 다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래 사회가 깊이 병들어 있음을 알고 이를 치유하기 위하여 전면적인 치유계획을 제시하면서 508권의 방대한 저서를 집대성하여 「정다산 전집」과 「여유당 전서」에 망라케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1974년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다산 정약용' 표준영정 모습      © 경기데일리

 

다산은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였으나 퇴계의 주자학적 실천윤리와 이기설(理氣說)을 합성하고 있다. 그는 서학(西學)에도 밝아 화성(華城)을 쌓을 때 서양기술을 원용하여 거중기(擧重機) 활차녹로(滑車轆轤)를 만들어 이용했다.

 

또 종두법을 소개하고, 임업에 관한 산림경제(山林經濟), 언어해설서 아언각비(訝言覺非)도 저술하였다. 특히 관리 생활에서 얻은 식견을 망라하여 국가경영의 준칙을 논증한 경세유표(經世遺表), 지방관의 치민(治民)에 감계(監戒)가 될 목민심서(牧民心書),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엮은 흠흠심서(欽欽心書)가 그의 대표작이다.

 

 다산은 “임금은 백성을 위하고, 군자는 자기를 바로 세운 뒤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해야 한다. 농업생산 제고를 위한 여전제(閭田制)를 행하고 토지 공개념을 도입하여 조세부담의 공평성을 기하여 능률적인 경제운영을 해야 한다. 신분제 개혁과 서얼(庶孼)철폐 등으로 평등사회,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어야한다. 과학이 민생에 도움이 되어야한다"며 실제로 기중기. 프리즘. 종두법 등을 발전 시켰다.

 

 또한 그의 문학사상에는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측은이 여기는 마음, 사회의 폐허를 비판하고 개혁을 하려는 경륜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의 교육사상은 현실적인 실용을 추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治用)의 실학교육을 주장하며 민생과 국가사회에 도움이 되는 학문 교육을 정도(正道)로 하였다.

 

▲ 다산 유적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 소재     © 경기데일리

 

훗날 정인보 선생은 그를 가리켜 ‘근세조선의 유일한 정법가(政法家)’라 했고, 안재홍 선생은 ‘조선의 대선각자요 대선구자이며, 문(文)의 제일인자’로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다산은 큰 실학자로 한국이 자랑할 만한 선각자이며 세계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정치. 경제. 역사. 철학. 문학. 지리. 의학. 교육. 군사. 자영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에 능통한 대가였다. 늘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보살피고 빈부격차를 조정하는 정치를 희구하였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전방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은 시대의 개혁자이며 애국애민의 길을 걸어간 진정한 선비였다.

 

 그러나 다산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는 노자(老子) 도덕경의 한 구절로 ‘마치 코끼리가 살얼음을 걷듯이 조심조심 산다.’는 뜻으로, 다산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목숨만 부지하며 숨도 크게 안 쉬고 살았다.’고 한다. 일본이 선진국 깃발을 달고 대륙을 넘볼 때 조선은 권력 다툼으로 다산을 강진으로 귀양을 보내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산 유적지 입구에 새겨진 ‘지식이란 시대의 환부가 어디이며, 치료를 위해서는 어떤 처방을 할 것인가를 언제나 깨달아 있는 정신으로 살펴야 한다.’는 말과 다산동산 주위에 새겨진 ‘다산의 6대 정신’을 읽고 위기에 처한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정신구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여유당 전집 10권에 있는 ‘강물은 흘러흘러 쉬지 않고, 삼각산 높고 높아 끝이 없도다. 산천은 변하여 바뀌고 있지만, 당파 짓는 나쁜 버릇은 부술 날이 없구나.’ 라는 말을 음미하면서 다산의 시대와 오늘의 정파싸움이 어떤가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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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2/03 [09:12]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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