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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열 칼럼] 산과 물을 보며 세상을 본다
 
조상열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21/05/06 [16:46]
▲ 조상열 칼럼니스트, 대동문화재단 대표     

“선현(先賢)은 명산(名山)을 만들고, 명산은 선현을 만든다.”라고 했다. “명인이 있어야 명산이 된다.”라고 하듯이 땅은 사람을 통해서 이름이 난다.

 

풍수나 지리, 풍광이 빼어나 유명해진 산도 있지만, 유명한 사람으로 인해 명산이 되고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경우가 더 많다. 전자가 경관을 바탕으로 한 자연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인문적인 것이다. 산 자체는 자연적이지만 명산이란 말에는 ‘이름난’이란 인문적 관념이 함께 들어 있다.

지리산과 청량산은 남명과 퇴계로 인해 유명해진 산이다. 경북 봉화에 있는 청량산은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빼어난 경관으로 사랑을 받아왔고, 고려시대까지는 30여 개의 크고 작은 절이 자리 잡을 정도로 불교의 산이었다. 그러나 유학의 나라 조선에 들어와서 퇴계 학문의 성지가 되면서 퇴계 이황의 산으로 탈바꿈되었다.

 

 남명 유학의 중심이 되었던 지리산은 남명의 기상과 상징으로 여겨지는 성산이다. 남명은 지리산 자락 합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만년에는 천왕봉 아래 산청에 산천재를 짓고 살았으며, 죽어서는 손수 터를 잡은 지리산 자락에 묻힌 지리산인이었다. 지리산(두류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남명의 절창이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와 보니 /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 아이야 무릉도원이 어디인고, 난 옌가 하노라.”

 

지리산(방장산)은 금강산(봉래산), 한라산(영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는 민족의 성산이다. 백두산의 기가 흐른다 해서 두류산(頭流山), 남쪽을 대표하는 남악을 비롯 조선 창업에 비협조적인 탓으로 이성계에게 비롯된 반항산, 적구산, 불복산 등 모두 7개의 이름을 가진 만큼 일화도 다양하다.

 

 고려 말 이성계는 새 나라 창업의 뜻을 품고 백두산을 찾아가 기도를 올렸으나, 신은 그의 역심을 불허했다. 그는 다시 남쪽 두류산과 무등산 신을 찾아가 기도를 올렸으나 역시 헛수고였다. 마침내 남해 보광산을 찾아가 천지신명에게 정성스런 기도를 올린 후에야 비로소 새 나라 창업의 꿈을 이루게 되었고, 훗날 조선 창업에 협력한 보광산에 비단 금자를 쓴 금산(錦山)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반면 비협조적이었던 무등산은 무정한 산이라 해서 무정산(無情山), 등급도 없는 무등산(無等山)으로 불렀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합천의 가야산은 팔만대장경과 그로 인해 법보사찰이 되는 해인사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최치원이 없었다면 과연 홍유동 계곡이 그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할까 싶다. 신라 말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치원은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6년 만에 장원 급제를 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당나라 말 농민반란인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을 지어 난을 평정하면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신라 헌강왕 때 귀국하여 요직에 올랐으나, 뜻에 맞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고 만다. 그는 훗날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가야산은 최치원의 산이라 할만하다.

 

 예나 지금이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으로는 속리산(俗離山)이 제격이다. 조선 세조왕이 속리산 세심정 등 계곡을 찾아와 목욕을 했다하여 유명해진 산이지만, 사실은 백호 임제로 인해 더욱 품격이 높아진 인문학의 산이다. 임제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는데 속세가 산을 떠나더라.(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理山)” 라고 설파했다. 그는 이십대 초반 속리산으로 당대의 석학인 대곡 성운을 찾아가 학문하면서 <중용>을 800번이나 읽고 문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임제는 39살에 요절을 했지만 전국을 유람하며 숱한 일화와 일천여 편의 시를 남긴 조선의 대표적 시인이자 풍류남아였다.

 

 남도 강진 땅에 만덕산이란 작은 산이 있다. 만덕산 자락에는 백련결사의 도량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유배 살이 10여 년 동안 후학 지도와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이라는 불후의 업적을 남긴 곳이다. 만덕산은 야생 차나무가 지천에 있어 ‘다산’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정약용도 ‘다산(茶山)’을 기꺼이 자호로 삼았다.

 

또한 이곳에서 고려시대 이후 사라져 버린 차 문화를 부활시켜 꽃피도록 했던 다산은 이웃 백련사 승려 아암 혜장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이어 장흥 보림사, 대흥사의 초의선사를 비롯 추사 김정희에게 이어지며 화려한 차 문화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조선 후기 실학과 차 문화의 성지인 만덕산(다산)은 정약용으로 인해 인문학의 산으로 사랑받고 있다.

 

 중국 고대 문화의 본산은 태산과 무이산 그리고 적벽을 들 수 있다. 공자가 없는 태산, 소동파가 없는 적벽, 주희가 없는 무이산(武夷山)이라면 어찌 오늘 같은 천하의 명성을 얻었겠는가. 남송의 주희는 무이산 구곡 절경에 심취하여 손수 무이정사라는 서원을 세워 200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면서 학문에 정진하며 만년을 보냈다. 그가 무이구곡을 노닐며 지은 무이도가(武夷棹歌)는 송나라와 조선의 문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로 인해 그곳은 오늘날 전 세계인이 찾는 관광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공자가 곡부의 태산에 올라 “뒷동산에 올라보니 노나라가 작음을 알았고, 태산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작다는 것을 알았다.(登東山而小魯, 登泰山小天下)”고 한 말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언이다. 훗날 맹자는 “바다를 본 자에게는 어지간히 큰 강물은 물 같아 보이지가 않고, 성인(聖人) 문하에서 배운 자에게는 어지간한 말은 말같이 들리지가 않는 법이다.”라고 했다. 세상은 넓고 천하에는 고수(高手)가 많으니, 우물 안 개구리 꼴을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옛 선비들이 산을 찾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선비들에게 산은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는 관광이나 등산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공자는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다. 물은 늘 낮은 웅덩이를 채우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가 다른 웅덩이를 채운다. 흐르는 물이 선두를 탐내지 않는 것처럼 후덕한 산과 쉼 없이 흐르는 물을 보고 자신의 끊임없는 정진, 덕성의 함양, 성찰과 도야를 해야 할 도덕의 본보기로 삼은 대상이 산과 물이었던 것이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다. 퇴계는 “산을 유람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讀書與遊山)”라고 했고, 남명은 “산을 보고 물을 보며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라고 했다. 또 소동파는 “만 권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신명(神明)과 통한다.(讀書萬卷始通神)”라고 했고, 동양학자 조용헌은 “만리를 여행해야 마침내 제대로 분별을 할 수 있다.(旅行萬里終分別)”라고 했다. 모두가 가슴 깊이 새길 만 한 주옥같은 명언이요,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온갖 초목들이 진한 초록으로 빠르게 물들고, 만화(萬花)가 다투어 피며 상춘객을 부르는 봄날이다. 산과 물을 찾아 어디로든 나서 봐야겠다. 운이 좋으면 그리던 남명선생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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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5/06 [16:46]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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