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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열 칼럼] 세종과 이순신의 리더십
 
조상열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21/06/01 [11:37]
▲ 조상열 인문학 칼럼니스트, 대동문화재단 대표     

 가정의 달 5월을 넘어서자 6월 1일 ‘의병의 날’을 시작으로 호국의 달이 문을 열었다. 일 년 열두 달, 달마다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특히 5월과 6월은 가정과 나라를 생각하게 하는 달로 ‘집안이 화목해야 나라도 화평해진다.’는 제가치국(齊家治國)의 이치가 생각난다.                                              

 

선거 바람이 슬슬 시작되면서 저마다 국가를 책임질 목탁(木鐸)임을 자처하며 자천타천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후보군들은 출마와 유세(遊說) 등으로 야단이다. 이럴 때면 이 시대의 참지도자 상(像)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면서, 우리역사 속에 위대한 인물 세종과 이순신을 떠올려 본다. 

 

역대 왕 중에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은 특출한 능력과 깊은 덕망으로 백성과 함께하면서 조선을 태양처럼 높고 밝게 꽃 피운 지도자였다. 세종 탄신일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삼은 연유가 이 때문이다. 

 

 성웅으로 불리는 충무공 이순신은 국난에 조선의 자존심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조선 개국 2백 년째 되는 임진년, 왜군의 침략으로 강토는 유린되고 백성들은 도륙을 당했으며, 설상가상 임금은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나니,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이순신은 선조와의 갈등으로 백의종군하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한 구국충정으로 꺼져가는 조선의 등불을 다시 살려 놓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 세종대왕 영정과 이순신 장군 영정     © 박익희 기자

 

 세종과 이순신은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일이 어떤 일인가를 몸소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니,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이들을 꼽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두 사람의 경영철학과 리더십은 수백 년이 지난 이 시대 CEO들에게도 롤 모델이 되고 있다. 

 

 이들 리더십의 핵심은 늘 스스로를 낮추고 귀를 열어 아랫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토론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려는 소통의 자세였다. 세종은 재위 19년 5월 8일 ‘국왕찬양금지법’이라는 특이한 법을 만든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여 아부 아첨하는 자를 철저하게 경계하려고 한 세종의 의지가 담겨있는 법이다. 아부 아첨을 경계하는 지도자는 성공을 하고, 이에 취한 지도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대장부 세상에 태어나 쓰임을 받으면 죽을힘을 다해 충성할 것이요, 쓰임을 받지 못하면 농사짓고 사는 것으로 족하다.”라며 묵묵히 주어진 직분에 충실했다. 장군의 군막 안에는 ‘운주당’이란 회의실이 있었다. 일반 병사들과 바둑도 두고 막걸리도 마시면서 군부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백성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온몸으로 듣곤 하는 장소였다.

 

 딱딱한 회의나 틀에 박힌 보고보다는 자연스런 자리에서 그들의 고충과 아이디어를 가감 없이 들으면서, 수군의 경영과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는 소통의 열린 공간이었다. 밥 공덕이라 했던가. 마주 앉아 밥 먹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만사가 술술 풀리게 마련이다. 충무공의 23전 23승이라는 불멸의 신화 또한 수없는 실전훈련과 철저한 원칙과 준비로 기인한 것이나, 본 바탕은 어려서부터 쌓아온 독서량이 또 하나의 기초가 됨은 물론이다.

 

 이순신은 옳지 않은 부당한 일은 철저하게 거부했고, 원칙 앞에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리더였다. 그가 훈련원 인사업무를 담당할 때 상관 서익이 편법으로 자신의 친척 한 명을 승진시키려고 인사압력을 가해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부적격자를 승진시키면 적격자가 승진하지 못하니, 이는 불공정한 일입니다.”라며 법규를 들어 상관의 청탁을 거절했다. 분개한 서익은 훗날 이순신에게 좌천과 파직으로 보복했다. 

 

 세종도 인재를 쓰는 원칙이 분명했다. 능력자는 발탁 등용했고, 천거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면 추천한 사람도 벌을 주었다. 단점을 지적하는 대신 일을 잘 할 수 있는 전문가, 강점을 찾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는 인사를 기본으로 삼았다. 코드에 맞는 사람들끼리가 아닌 능력을 지닌 신료들을 발굴하여 국가경영에 도입했다. 

 

 세종시대를 이끈 주역들을 보자. 원칙주의자인 허조는 법가, 중용의 덕을 지닌 타협의 고수 황희는 유가,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자연론자 맹사성은 도가, 문장력이 일품인 변계량은 불가적인 사람이었다. 세종은 이들의 영재성을 드림팀으로 만들어 조선의 융성한 발전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되 친소(親疎)와 귀천(貴賤), 네 편과 내 편을 가르지 않았다. 관노 출신 장영실을 발굴해 중국 유학을 보내고 벼슬을 내리는 등 조선 최고의 천문과학자로 만들었다. 황희는 서얼 출신으로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간통죄 등에 연루되었지만, 그보다 깊은 학문과 경륜, 정책 아이디어, 주변 신료들과의 네트워크와 소통 등 그의 능력을 더 높이평가해서 과감하게 등용했다. 

 

 노비인 장영실과 부패 관료인 황희가 세종시대 최고의 인물이 된 것은 주인으로서 부하의 결점을 보듬고 장점을 취해 고양시킨 결과였다. 

 

 세종과 이순신이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자질(資質)은 하루아침에 갖춰진 것은 아니다. 본래 셋째 왕자였던 세종(충녕대군)은 세자가 되거나 왕위에 오를 처지가 아니었다. 아버지 태종은 늘 충녕에게 왕도수업이 아닌 궁궐 밖에 나가서 마음껏 즐기며 놀도록 했다. 

 

 하지만 타고난 공부벌레였던 충녕은 이러한 기회를 활용해 다양한 학문은 물론 꽃과 돌, 천문, 서화, 음악 등 잡학을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몸소 민초들의 삶과 다양한 경험을 읽힌 공부는 훗날 그가 성군이 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과 이순신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낮은 자세로 아랫사람과 어울리며 공부하고, 몸소 흙수저의 삶을 체득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준비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훌륭한 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어떤 준비가 되어있고, 또 어떤 공부를 체득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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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6/01 [11:37]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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